이 글에서는 성곽의 등성계단과 현안에 대해 설명하겠다. 등성계단은 성벽을 오르내리기 위한 시설로, 주로 석재와 전돌로 만들어졌으며, 성곽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안은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벽에서 홈을 파내어 뜨거운 기름이나 물을 흘려보내는 장치로, 성곽 방어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등성계단
성벽으로 오르내리기 위한 계단을 등성계단이라 한다. 계단이란 높이가 다른 곳을 오르내리기 위한 시설이어서 비록 성곽뿐만 아니라 일반 건물에도 많이 사용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서 성곽의 계단을 의미하는 용어로 석등, 석제, 보석, 층제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다소의 의미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등이란 석재로 마련한 간단한 계단으로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장안문내도에 적대에 오르도록 마련된 계단을 지칭하고 있다. 벽등은 석등과 마찬가지이나 재료가 전돌로 된 것을 의미한다. 석제 역시 돌계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성문 좌우측에서 문루에 오르기 위한 돌계단을 도면으로 제시하면서 석제라 하고 있다. 성곽에 있어서 계단은 기본적으로 석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전돌, 그리고 목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에서 전돌이 계단 재료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조 후기에 전돌이 축성에 실용화되면서부터로 보이고, 목재가 사용된 경우는 목조건물의 일부로서 또는 임시시설의 계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협축된 성벽에 오르기 위한 등성 시설로는 높지 않은 석축에 토사로 둔덕을 마련하여 완만한 경사를 조성하여 오르내리기도 하였다. 현문 형식의 성문에 오르내리기 위해서는 주로 목재로 된 계단으로 추정되며, 특히 문루가 중층건물인 경우 목재의 층제가 사용되었다. 기능상 등성계단은 주로 성내에만 마련되는데, 특수한 예이기는 하나, 낙안읍성 서문의 북측성벽 외부에 특수하게도 성외부에 좁은 등성계단을 두어 성외부에서 오르도록 한 예도 보인다. 이는 계단이 위치한 곳이 성문지역으로 성문을 닫은 시간에 성 내외의 통행편의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문지에 마련한 비상구 시설로 보인다. 등성계단은 대개 석재나 전돌이 대부분이고 임시재료로 목재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등성계단이 필요한 성곽은 주로 협축성에서 많이 보인다. 협축성의 경우 유사시를 대비하여 성벽상단으로 오르내리기에 큰 불편이 없도록 적절한 간격마다 계단을 마련하여 두었다. 계단 형식은 다양한데, 성벽내부에 덧대어 계단을 마련한 경우와 성벽의 일부를 파내어 마련한 형식이 보인다. 덧대어 축조하는 계단 형식은 특별한 계단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축성이 완료된 후에도 얼마든지 덧대어 축조하여 계단을 조성할 수 있어 편리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벽의 일부를 파낸 형식의 계단은 축성 시에 의도적으로 계단 계획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등성계단에 관련된 기록으로, “본도 각 고을의 읍성은 흙을 메우지 않은 곳이 많아 성이 견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벽상부가 협착하여 성을 지키기도 어렵고, 또 성문 안에 좌우에는 성에 올라가는 계단이 없어 성을 지키는 사람이 창졸간에 성에 오르기가 역시 어려우니 매 일면의 4.5처에 우선 흙 계단을 쌓게 하고, 풍년을 기다려서 역시 내면에 흙을 메워 쌓아서 수어에 편하게 하십시오.”라 한 것으로 보아 성곽의 계단의 필요성이 언급되고 있다.
현안
현안이란 성벽 위에서 성벽 바깥으로 홈을 파내서 적이 접근하였을 때 뜨거운 기름이나 물을 흘려보내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시설이다. 화성에서는 옹성에만 무비지 제도에 맞게 전돌로 만들고, 공심돈과 적대 등에는 돌을 가공하여 마련하였다. 유성룡의 축성론에서 “근래 중국에는 현안이라는 방식이 있다. 곧 타 안에다 구멍을 뚫어 바로 성 밖까지 나와서 성 밑의 적을 환히 내다보고 때려잡는 방법인데, 이 방법이 매우 좋다”라 하여 소개하였다. 즉 이를 통하여 임란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성제에서는 현안 제도가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그의 문집에서 “현안이란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성에 부속된 장치이다. 그 제도는 타안의 시초에 불과하지만, 그 쓰임새는 긴요하다.”라 하였다. 또 “타마다 가장 중심 부부에 성의 평면으로부터 구멍을 뚫는데, 크기에 알맞게 벽돌을 구워서 점점 밑으로 내려갈수록 층계를 이루면 좁아지게 쌓아 적병이 성벽아래에 이르면 빠짐없이 단번에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화살이나 돌, 총 등으로 모두 이용하여 공격할 수 있는 참 좋은 방법이다.”라 하였다. 정조 5년 병조참의 윤면동은 현안의 활용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즉 “가마솥을 맡은 부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마들의 여인들 가운데 노성한 사람을 뽑아내어 10명씩으로 한 대오를 만들고 또 부통 같은 물건을 준비하여 물이 펄펄 끓는 여러 가마솥에서 자루가 긴 나무바가지로 운반해 쓰게 하는데, 적이 성벽으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어부으면 좋습니다.” 이를 통하여, 현안을 마련하는 목적과 활용하는 방안을 알 수 있게 한다. 기효신서에는 타와 여장 그리고 여장하단에 뚫린 현안 그림이 있다. 기효신서의 여장과 현안의 제도는 화성에 그대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특히 화성에서는 1타에 근총안 1개와 원 총안 1개를 뚫었는데, 이는 기효신서의 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다. 아울러 기효신서에는 타마다 현안이 뚫려 있지만 이것은 채택되지는 않았다. 이 현안은 성벽 바로 밑에 달라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인데 명대에 개축한 중국의 만리장성에는 여장 밑 부분을 공격할 수 있게 밑으로 길게 내리 뽑지는 않았다. 기효신서는 이 제도를 좀 더 발전시켜 길게 아래로 향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현안제도는 함북 경성에서 마련된 바 있다 고 보고되어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강도지에 의하면 “원성에는 또 현안제도가 있으니, 곧은 구멍을 뚫어 밖을 내다보면서 적을 격살할 수 있는 방법을 시설한 것인데, 이 법이 표한 것이기는 하지만 쌓는데 드는 벽돌을 창졸간에 마련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 하여 현안시설의 어려움을 설명한 내용이 보인다. 현재 현안 시설은 화성에서 보이는데, 이는 기효신서에 있는 것과 같이 일부 시설은 전돌로 마련한 것이 보이나, 장안성 지역에는 석재로 정교하게 다듬어 마련한 시설이 보인다. 이 현안은 다 같이 성벽에 접근한 적을 퇴치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성벽이나 적대시설에 2개 또는 3개의 선을 내리 그은 형식의 시설이어서 의장적인 효과를 보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화성에 마련된 현안은 장안문의 옹성에 16개소, 팔달문의 옹성에는 12개소, 장안문 적대에는 3개소, 팔달문 적대에 2개소, 화서문과 창룡문의 옹성에는 각각 3개소씩, 동북노대에 2개소, 서북공심돈 4개소, 남공심돈 4개소, 서북각루 2개소, 그리고 서일치, 서이치, 서삼치, 동일치, 동이치, 남치, 북동치 등에 각각 1개소씩 마련되어 있다. 현안의 크기는 위치별 다소 차이를 보이는데, 장안문과 팔달문의 옹성에 마련된 현안은 폴 1.2척, 길이 12척이고, 남문과 북문의 적대에 마련된 현안은 폴 1.5척, 길이 20척이며, 창룡문과 화서문의 옹성에 마련된 현안은 폭 1척, 길이는 8.5척으로 다소 차이를 보인다. 지금까지 성곽의 시설 중 등성계단과 현안에 대해서 알아보았다.